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 제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스웨덴은 [[칼마르 동맹]]으로 [[덴마크 국왕]]이 [[스웨덴 국왕]]을 겸하면서 사실상 [[덴마크]]에게 지배당했지만 [[구스타브 1세 바사|구스타브 바사]]가 이끈 독립 전쟁으로 독립을 달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덴마크와 대립했다. 1611년, [[구스타브 2세 아돌프]]는 즉위하고 나서 [[루스 차르국]]과의 전쟁으로 켁스홀름(Kexholm)[*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(Käkisalmi). 현재 [[러시아]] 프리오제르스크(Приозе́рск)]을 위시한 [[라도가 호|라도가]] [[카리알라]]와 [[잉그리아|잉에르만란드]](Ingermanland)를 석권하여 오늘날 [[핀란드]]의 지리적인 영토를 완성함과 동시에 핀란드와 [[에스토니아]]를 육로로 연결하는 한편 [[루스인]]의 [[발트해]] 진출 시도를 원천 차단하였다. 그리고 부왕 [[칼 9세]]때 벌어진 칼마르 전쟁은 훗날을 기약하며 덴마크 국왕 [[크리스티안 4세]]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마무리하였고, 사촌형이자 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 중이었던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의 [[지그문트 3세 바사|지그문트 3세]]를 압박하여 [[리보니아]]를 석권한 후, [[30년 전쟁]]에서는 가톨릭 동맹을 상대로도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. 그가 전사한 [[뤼첸 전투]]에서도 이겼으며[* 다만 뤼첸 전투는 스웨덴이 전술적으로 승리하고 전략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지만, [[스웨덴군]]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양측의 피해는 비슷하거나 [[발렌슈타인]]이 이끄는 제국군이 오히려 더 적었다. 스웨덴군은 국왕도 전사하고 정예 부대들이 크게 소모되어서, 이후 [[뇌르틀링겐 전투]]에서 스웨덴군이 증발해버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.] 이를 통해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가 30년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을 끝냈다.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기의 스웨덴은 과거부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소유한 데다가 30년 전쟁에 개입한 결과 [[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|포어포메른]], [[오데르강]], 베저강 입구를 장악했다. 구스타브 2세는 전쟁뿐만 아니라 내정 개혁에도 힘썼으며 특히 이전까지 [[용병]]이 주축이 되었던 전쟁에서 귀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군사를 징병할 수 있는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다. 특히 스웨덴의 군사 제도는 아직 군사적인 발전이 미흡했던 루스 차르국이나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 등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.[* [[대북방전쟁]] 당시 [[표트르 대제]]는 러시아 특유의 인해전술에 스웨덴 군사 제도를 카피하여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,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[[프리드리히 빌헬름]]은 스웨덴군을 모델로 군사 개혁을 이끌어 페르벨린 전투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승리하였다.]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한 후 유일한 자식인 [[크리스티나 여왕]][* 위로 세 명의 형제들이 있었지만 모두 사산되거나 생후 1개월만에 사망했기에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한 시점에서 유일한 직계 왕족이었다.]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로 [[가톨릭]]으로 개종하고 스스로 퇴위하면서 바사 왕조는 단절되었고[* 당시 스웨덴 국법에 따르면 국교는 복음주의 [[루터회]]였고, 루터회가 아닌 왕족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], 왕위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고종사촌 오빠인 팔츠 [[비텔스바흐 가문]]의 [[칼 10세 구스타브|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카를]]이 칼 10세 구스타브로 즉위하였다. 칼 10세 구스타브는 [[카자크]] 봉기로 정신없던 [[대홍수(역사)|폴란드-리투아니아를 공격]]하여 폴란드-리투아니아의 1/3을 점령하는 한편 폴란드 왕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. 덴마크가 침공해오자 폴란드에서 물러나 덴마크로 발걸음을 돌려 [[코펜하겐]]에 입성하여 로스킬레 조약으로 덴마크의 [[스코네]], 블레킹에, 보른홀름 섬과 [[노르웨이]]의 트뢰넬라그, 보후슬랜을 석권하여 스웨덴의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. 이후 덴마크를 완전히 정복할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 실패하여 보른홀름 섬과 트뢰넬라그는 반환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던 스코네와 블레킹에, 보후슬랜은 지켜냈다. 구스타브 2세, 크리스티나 여왕, 칼 10세 구스타브 3대에 걸친 전쟁의 결과 스웨덴은 영토 상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. 기존의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외에도 잉에르만란드, 리보니아, [[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|포어포메른]], [[비스마르]], [[브레멘]]을 편입시켰으며 유럽 바깥에도 [[북아메리카]]에는 [[뉘아스베리예]], [[아프리카]]에서도 [[황금해안]] 등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. 거의 반 세기 동안 계속된 전란에서 스웨덴은 덴마크, 폴란드-리투아니아, 루스 차르국을 압도하였다. 미성년의 [[칼 11세]]의 치세 초창기에는 [[브란덴부르크-프로이센]]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[[네덜란드 공화국|네덜란드]]와 연합한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나 프랑스의 중재로 포어포메른과 스코네를 되찾았다. 프랑스는 유럽의 열강이었고, 그런 프랑스가 스웨덴이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비교적 스웨덴이 유리하기도 했다. 스웨덴의 성장을 견제하려고 폴란드 왕이자 [[작센 선제후국|작센]]의 [[선제후]]였던 [[아우구스트 2세]]는 덴마크-노르웨이 왕 [[프레데리크 4세]], 루스 차르국의 [[표트르 1세]]와 동맹을 체결, 1700년 [[대북방전쟁]]을 일으켰다. 그러나 [[칼 12세]]의 반격을 받아 덴마크가 곧바로 이탈하고, 루스 차르국은 [[나르바]]에서 대패하였으며 폴란드-리투아니아에 대한 집중 공격에 버티지 못한 아우구스트 2세는 폐위당하고 작센으로 쫓겨났다. 허나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지속했던 스웨덴은 무리한 러시아 침공의 결과 [[폴타바 전투]]에서 대패하면서 수세에 몰렸고, 폴란드-리투아니아도 아우구스트 2세가 복위하여 반격에 나섰다. 여기에 덴마크, [[프로이센 왕국]], [[하노버 왕국|하노버 선제후국]]까지 전쟁에 가세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면서 결국 한때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스웨덴은 포어포메른을 제외한 발트해 영토를 모조리 빼앗겼다.[* 그 포어포메른도 중심지인 [[슈테틴]]은 프로이센에 내주었다.] 이후 [[카리브해]]의 [[생바르텔레미]]마저 1878년 프랑스에 매각해 [[식민제국]]은 완전히 해체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